창세기가 기록되어진 것은 언제인가 할 때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성경을 토라라고 말합니다.
토라를 다르게 말할 때에는 모세 5경이다 말합니다.
모세로 인하여 기록되어진 부분이기 때문에 모세 5경이다 말하는데,
유대인들에게 성경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선택하라 그러면 이 토라만이 성경이다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5경, 토라는 성경에서 전통적인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유대교에 속한 랍비들, 유대교 안에서의 제사장들은 모세 5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말씀도 복음서와 함께 연결되어져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토라라고 하는 모세 5경의 말씀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이냐 하면 책으로 기록되어진 것은 모세가 살았던 시대입니다.
모세에 의해 기록되어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세기 내용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가 할 때에는 모세보다도 훨씬 이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의 조상들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져 있는데, 이 원어 모두에 운율(가락)이 들어있습니다.
즉, 운율에 맞추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리듬을 타도록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반복해서 규칙성이 있도록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컨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 것은 바나나”,
이런 식으로 연상되게끔 중복시켜 나가는 형식도 창세기가 기록되어져 있는 방법입니다.
왜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느냐면, 원래 창세기의 말씀은 기록되어지기 이전에 할머니 무릎에서부터 구전되어
이어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기록되어지기 이전부터 계속해서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하면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그 중앙에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수메르 족속들이 살았는데, 그들이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겼는데,
점토판에 새긴 문자의 그 내용을 보게 되면, 창세기의 내용과 일치되어지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점토판 쐐기 문자를 가진 민족이 아닙니다.
그러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민족들이 점토판에 쐐기 문자를 새겼을 때,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어를 발명하고,
기록하기 이전에 할머니 무릎에서 구전되어져 내려가는 그런 운율을 담은 구전시켜져 말로써,
어린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잠재울 때에 들려주는 리듬에 실어 들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한 형식으로 히브리인들에게 오래 전 조상으로부터 물려져 내려오고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져 온 내용들을 히브리인들이 애기를 잠재울 때에도 이러한 내용으로 불렀던 것인데,
그것을 모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순서와 절차에 맞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가 언제 기록되어져 있었느냐하는 것보다도 창세기는 인류의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말씀이다,
이렇게 받으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 그 말씀을 우리가 지금 접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창세기는 말 그대로 세상을 창조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창조한 내용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타협점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러할 것이다 예상한다든지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선언이므로 그러할 것이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었다라든지 아니면 있겠느냐, 없겠느냐 라든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시작됩니다.
먼저는 여기에 큰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태초입니다.
그 다음에 공간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천지입니다.
그 다음에 주체자가 있습니다. 주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에 동사가 있습니다. 창조하시느니라.
이 네 가지 개념을 줄여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무엇을 창조하셨느냐 할 때에 시간과 공간을 열어가셨다하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역시 시간과 공간으로 모든 것이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시간을 없애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여기에서 공간을 없애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우리 인생이 존재하는 방식은 시간이라고 하는 씨줄과 공간이라 하는 날줄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이 순간이 내가 존재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정지되어 버리면 나는 죽은 거에요.
공간이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끝나버리면 내 인생이 없는 겁니다.
또, 아무리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공간이 사라지면 우리는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라고 하는 씨줄과 공간이라고 하는 날줄이 함께 있음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우리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전부터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생을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이 조건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태초에 사람 아담과 마지막 인간, 오메가 되는 어떤 인간도 전부 동일한 조건과 여건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질 수 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체자 하나님, 여기에는 주격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격 명사입니다.
그러면, 나는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태초에 창조하시니라.
오늘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다”.
이것 한 가지만 배워도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 하는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내가 주인이 아니고, 또 공간에 대해서도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존재케 된 것도 내가 스스로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던지 죽던지 우리가 다 주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환경과 여건과 또 내 자신마저도 내가 주인이 아니므로 창조하신 분의 뜻 앞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을 섬기는 것이 인생의 참된 도리이다, 이렇게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