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에서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동사는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창조는 제조와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할 수 있겠습니다.
제조는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라면,
창조는 없는 것에서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라고 하는 것은 근원부터 시작케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권능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태초라고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고, 천지라고 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개념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씨줄과 날줄과 같아서 씨줄과 날줄로 인해서 천이 짜여지고 펼쳐져서 면이 되듯이,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도 시간과 공간에 만남 가운데 인생이 펼쳐진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간을 한 번 제거해보자 하면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공간을 다 제거해보자 하면 우리가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마주치는 그 접점이 인생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모든 삶은 누가 창조하신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조성한 것이 아니고 공간이라고 하는 것도 내가 펼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그 주권이 다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펼쳐진 모든 정황이라는 것, 정황은 곧 공간과 시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모든 정황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의 창조자와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하나님은 근원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펼치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목적하심을 가지고 우리는 제조해 갈 수 있는 권한이 인생에게 주어진 것이다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조성하시고 계획하신 이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가 거기에 제조해 갈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마치 자연미와 조형미가 있는데 자연미라는 것은 창조되어진 것이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형미라고 하는 것은 제조되어진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자연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조형미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을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이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셨는지를 우리가 알고,
우리는 거기에서 조형미를 더해가는 것, 또 씨줄과 날줄을 통해서 펼쳐진 천이 있다면,
거기에 우리가 우리의 인격으로 무엇을 수 놓아 갈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여되어진 하나님의 미션이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안에 우리 겉사람이 살아가는데, 시간이 있고 공간이 주어졌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은 또 우리 겉사람이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세계가 있고,
또 우리가 그 안에서 나의 어떠한 미션을 수행해서 하나님의 뜻에 조화를 이루고 살 것인가 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제 이 성경은 늘 우리의 겉 사람이 어떤 정황에서 살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우리 속사람을 하나님이 어떤 정황에 두시고 어떻게 속사람의 성장 과정이라든지
속사람이 생명을 어떻게 영위해 가느냐에 대해서도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창세기이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태초'가 언제이냐 하는 것,
이것은 시간 개념인데 시간 개념 중에서도 가장 앞선 시간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을 객관화 시켜놓고 보면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고,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이 있다 했습니다.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은 물리적인 객관화 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한다면,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은 주관적인 시간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라는 개념에서 점심시간이 언제냐 하면 회사에서 정해놓은 점심시간이 됩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라는 개념 안에서의 점심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배가 고파서 숟가락을 뜨는 그 순간이 점심시간이 됩니다.
이것은 내 생명의 법에 따른 점심시간이죠.
그래서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태초’를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 안에서의 태초
그리고,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 개념 안에서의 태초로서 구분해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의미는 태초에 어떠했느냐 할 때에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너의 태초가 언제이더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객관적인 시간의 개념 안에서 태초라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왜 없느냐 그러면 우리가 객관적인 시간 개념의 태초를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신 그 순간이
태초이지 않느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 개념 안에서 하나님이 시간을 만드시기 이전에는 뭐가 있느냐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가 있으라 하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있으라 하신 그 바로 직전의 순간, 1초전..
그러면, 태초가 언제냐는 것이죠.
항상 그 때 그 앞에는 시간이 없었느냐, 그 시간 바로 직전은 언제였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처음이라는 것은 개념 안에서는 없는 겁니다.
여기서 태초라는 개념을 쓴 것은 저절로 어떤 의미이냐 하면은 내 속사람에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길 때,
비로소 나의 태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기지 않은 사람은 아직까지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 안에서
자기의 태초가 아직 없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천지가 있겠고 창조가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아~ 하나님이 계셨구나(계시구나)"
이렇게 되어야 그 사람에게 태초가 있다는 것입니다.
21세기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이가 80이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그 사람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으면, 그 사람에게는 태초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객관화 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니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은 아직 인생에 있어서 태초가 없는 것입니다.
식물 인간인 사람에겐 의식이 없는 거죠.
자기의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식물 인간으로 7년씩 있었다는데, 그 분들에게 7년이라는 시간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태초가 있느냐..
이것은 나의 하나님이 있느냐.
그 다음에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하셨는데, 너에게 천지가 있느냐..
천지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도 땅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땅이 하늘의 운행에 따라서 변하는구나,
이것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느냐 할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해놓으셨구나 하는 것,
이 때 비로소 자기의 태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서 이 섭리와 이 사건이 전개되지 않으면
이 말씀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요한 사도 자신에게 태초의 개념은 '로고스'가 있으므로 태초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 것으로 열려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을 사도요한이 완성을 시켰다는 것이죠.
창세기 1장 1절 이것을 그냥 한 마디로 압축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사도이 보는 것까지 창세기 1장 1절의 의미를 우리가 부여하면서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안목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
그리고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하늘과 땅이 창조되어졌다 하는 이 표현은
내 안에서 내 속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게서 구분점이 나오게 되어졌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권위자가 계셔서 나로 하여금 하늘과 땅이 그로 말미암아 조성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태초가 즉 나의 태초가 시작되어졌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다.